퇴마록 외전 - 그들이 살아가는 법 요새 읽는 것




재작년 9월인가. 경향신문 면접을 갔었다. 당시 서류전형이 없었기에 거의 10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필기시험을 쳤고, 운 좋게도 필기에 붙은 15명이 되어 면접을 봤다. 경향에 가고 싶긴 했으나 사실 당시 나는 크게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신문사에 지원한 것도 경향이 처음이었다. 면접은 크게 어렵진 않았지만 느낌이 썩 좋지도 않았다. 열정이 보이지 않았겠지. 그나저나 그 때 할아버지들 중 한 분이 내게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었었다. 왠지 그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그 당시 읽었던 '시계 태엽 오렌지'라고 준비를 해갔고, 그렇게 말했다. 뭐 가장 감명깊은 책은 아니었으나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책이었기에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할아버지가 그런 거 말고 진짜 감명깊게 읽은 책을 말하라고 했다. 오. 그럼 아예 솔직하게 나가자 싶어 난 당당하게 '퇴마록'을 외쳤다. 순간 벙찌는 할아버지의 표정. 당연히 퇴마록을 모르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박경리의 '토지'를 기대했던 걸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난, 당연히 면접에서 떨어졌다. 탈락 이후 예필재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서 이 에피소드를 얘기해줬고 난 거의 영웅이 됐다. 트라우마 따윈 없었다. 퇴마록을 모르는 할아버지들과 일하는 것도 썩 유쾌한 건 아니니까. 지금까지도 내 대답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서 퇴마록을 잊고 살았다. 국내편부터 말세편까지 전집이 다 있긴 했으나 일단 책이 대구에 있었고, 나는 나대로 또 읽어야 할 책들이 무지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서점에서 리뉴얼된 퇴마록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두두둥. 지난달인가, 퇴마록 외전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외전이라.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벌렁벌렁. 당장 사서, 그저께 1시간 20분만에 3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이건 말 그대로 외전이다. 악령이나 이미 괴물이 된 인간들과 싸우는 퇴마사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 4명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팬들을 위한 하나의 선물이랄까. 5개의 단편으로 구성돼 있고 각각의 시간적 배경도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 첫번째 단편은 박 신부와 현암, 준후가 처음 만난 해동밀교 사건 직후의 이야기다. 거처 없이 떠돌던 현암과 고아가 된 준후가 박 신부의 집에 모여 함께 살게 되는 에피소드. 퇴마록을 죽 읽어온 팬이라면 낯가리는 준후의 모습과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암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질 것 같다. 두 번째 단편은 당시 PC통신을 매개로 하여 사람들의 증오를 먹고 자라나는 악령을 퇴치하는 나름 '퇴마' 이야기. 세 번째 단편은 준후의 '국민학교' 등교 에피소드. 준후가 왜 학교에 계속 다니지 못했는지, 독자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네 번째는 승희의 합류 후, 승희와 현암 간 싹트는 감정에 대한 얘기다. 여성 팬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부분이다. 승희의 마음은 그때부터 시작되었구나. 혼세편 마지막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겐 또 하나의 서비스. 그리고 마지막 단편의 시점은 세계편 이후 퇴마사들이 외국에 머무르고 있을 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암의 라이벌(이라고 혼자 생각하는), 주기선생 박상준이다. 백호의 부탁을 받고 '생령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비 종교 교주를 잡으러 간 상준의 이야기. 넷의 이야기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적절하게 백호와 상준의 에피소드도 섞여 있어서 재밌었다.

훗. 이러니 1시간 20분만에 끝내버렸지. 이때까지 퇴마록을 읽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도대체 무슨 얘기냐 하는 책이 되겠지만 퇴마록을 충실히 읽어온 나같은 팬들에겐 정말 주옥같은 책! 퇴마록을 국내편부터 다시 쭉 읽어보고 싶다. 헤헤헤헤헤헤. 덕후인증!